장로여, 그 목사를 편들지 마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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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완구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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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한 자를 돕고 여호와를 미워하는 자들을 사랑하는 사람들-
“왕이 악한 자를 돕고 여호와를 미워하는 자들을 사랑하는 것이 옳으니이까?” (역대하 19장 2절)

유다의 왕 여호사밧은 본래 하나님을 경외하던 선한 왕이었다.
그는 종교개혁을 단행하고 백성에게 율법을 가르쳤으며, 이스라엘 역사 속에서도 드물게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한 일”을 행한 왕으로 기록되었다.
그러나 그처럼 신실한 왕조차도 어느 순간 어두운 타협의 길에 들어섰다.
정치적 안정을 위해, 그는 북이스라엘의 악한 왕 아합과 혼인 동맹을 맺은 것이었다.
아합은 바알을 숭배하며 하나님의 선지자들을 죽인 악한 왕이었다. 그럼에도 여호사밧은 “형제 이스라엘과의 화합”을 이유로 그와 동맹을 맺고 아합을 돕기 위해 전쟁에 나갔다가 큰 위기를 맞고 간신히 살아 돌아왔다.
그 일이 있고 난 뒤, 예후 선지자가 여호사밧을 찾아와 하나님의 책망을 전했다.
“왕이 악한 자를 돕고 여호와를 미워하는 자들을 사랑하는 것이 옳으니이까?” (대하 19:2)
이 말은 단순한 도덕적 비난이 아니었다.
그것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가 악과 손잡을 때 신앙의 본질이 무너진다는 선지자의 경고였다.
여호사밧은 이스라엘을 도와준다는 선한 의도를 가졌었지만,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와의 동맹은 언제나 하나님의 진노를 부른다.
타협은 언제나 진리의 순결을 희생시키는 것이다.

오늘 우리의 교회가 이 말씀 앞에 서야 한다.
“악한 자를 돕는 것이 옳으냐?”는 예후의 꾸짖음은, 수천 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교회를 향해 던져지고 있다.

나는 이 말씀을 다시 떠올릴 수밖에 없는 사건을 겪고 있다.
감리교 호남연회에 속한 한 교회에서 이단적 설교를 하는 목사가 등장했고, 나는 그 문제를 수차례 교회 안에서, 또 연회와 감독에게 알렸다.
그러나 돌아온 것은 회개의 움직임이 아니라, 그 잘못을 지적하는 나를 배척하고 왕따 시키는 행동이었다.

그 교회의 한 원로 장로는 신문 기사 댓글에 이렇게 썼다.
“우리 교회 천여 명의 성도 중 목사님의 설교에 이의를 제기한 사람은 단 한 사람뿐입니다.”
그 말을 읽는 순간, 나는 마음 깊이 절망했다.
진리가 다수결로 결정되는 세상,
신앙의 순결이 여론으로 재단되는 교회 ―
이것이 오늘날 교회의 현실이었고 영적인 현실이었다.
천 명의 교인이 있고, 스무 명이 넘는 장로가 있어도, 그 가운데 단 한 사람만이 설교의 오류를 분별했다면 그 교회는 영적으로 잠들어 있는 것이다.
엘리야가 850명의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 앞에서 홀로 섰던 것처럼,
예레미야가 “평강하다” 외치는 다수의 거짓 선지자들 속에서 홀로 눈물 흘렸던 것처럼,
진리를 지키는 일은 언제나 외롭고 눈물겨웠다.
그러나 하나님은 늘 그 ‘한 사람’을 통해 역사를 새롭게 하셨다.

나는 그 장로의 댓글에 이렇게 썼다.
“장로님, 목사를 편들지 마시고 예수님을 편드십시오.
잘못된 목사의 편을 들다가 장로님마저 이단 옹호자가 될까 걱정이 됩니다.
예수님의 편을 드는 자는 핍박을 받아도 하늘나라에서 큰 상급을 받지만,
이단의 편을 드는 자는 그 결말이 두렵습니다.”

이 말은 그 장로를 약올리려는 논쟁의 문장이 아니라, 내 신앙의 고백이었다.

오늘의 교회가 사람의 체면을 지키려 진리를 희생시키는 현실 속에서, 나는 다시 예후의 말을 통한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다.
“왕이 악한 자를 돕는 것이 옳으니이까?”

사도행전에서도 비슷한 내용이 나온다.
베드로와 요한이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 말라”는 명령을 받았을 때, 그들은 주저하지 않고 산헤드린 앞에서 꾸짖었다.
하나님 앞에서 너희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행 4:19)
그들의 담대함은 단순한 용기가 아니라, 복음에 대한 절대 충성이었다. 그 교회의 원로 장로가 비아냥 대는 것처럼 "자기 의와 아집에 사로잡혀서" 한 행동이 아니라, 예수님에 대한 절대적인 사랑 때문에 할 수 있었던 말이었고, 사람의 명령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더 두려워했기 때문에 선포할 수 있었던 말씀이었다.

교회가 진리를 외면할 때, 그 결과는 무겁다.
거짓은 늘 화평의 얼굴을 하고 다가오지만, 그 끝에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지 않는 타협이 자리한다.
WCC가 그렇고 WEA가 그렇다. 그리고 현재 문제가 되는 호남연회의 실상이 그렇다.
교회의 평안은 다수가 침묵할 때 오는 것이 아니라, 소수라도 진리를 외칠 때 회복된다.
세상은 “너는 누구의 편이냐?” 하고 묻지만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물으신다.
“이에 모세가 진 문에 서서 이르되 누구든지 여호와의 편에 있는 자는 내게로 나아오라 하매 레위 자손이 다 모여 그에게로 가는지라"(출애굽기 32;26)

나는 사람의 편에 서고 싶지 않다.
목사의 편에도, 제도의 편에도, 다수의 편에도 서고 싶지 않다.
나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편에 서고 싶다.

진리는 다수결로 정해지지 않는다.
하나님은 언제나 한 사람의 믿음을 통해 교회를 새롭게 하신다.
예후의 꾸짖음, 사도들의 담대함, 그리고 오늘의 교회 안에서 일어나는 한 사람의 외침.
그 한 사람의 진실한 목소리가 무너진 교회를 다시 일으킬 불씨가 될 것임을 나는 확신한다.


“너희가 사람을 기쁘게 하랴, 하나님을 기쁘게 하랴.” (갈라디아서 1:10)

-이 글은 감리교의 바른 분별을 위해 올렸습니다.-

이완구 박사(맑은샘내과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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