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글자 요한복음 연재(3): 핵폭탄 하나 투척할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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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연재(3):
핵폭탄 하나 투척할게요!
권혁정 교수
1장 말씀(말씀 하나님의 성육신)
샬롬!
오늘부터 요한복음 본문을 해설해 드릴게요. 지난 시간 두 글자로 각 장 제목 기억하는 매직쇼를 선보였는데요. 1장은 두 글자로 ‘말씀’이라고 했습니다. 첫 장은 말씀 하나님의 성육신을 다루고 있습니다.
요한복음의 덮개를 열면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라는 말로 시작합니다. ‘태초에’(헬. 엔 아르케)라고 하면 요한복음을 읽는 독자들은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는 창세기 1:1을 자연스럽게 떠올릴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들어갈 그 자리를 지금 ‘말씀,’ 즉 예수님이 차지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창조 사역의 주체를 요한이 ‘하나님’ 대신 ‘말씀’으로 대체한 것은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이 새 창조 사역, 즉 구속 사역을 하시기 위함임을 시사해 줍니다.
이 태초, 즉 영원 전부터 선재(先在)하신 말씀 하나님께서는 창조의 일꾼으로 두 종류의 창조 사역을 감당하셨습니다. 먼저 첫 창조 사역에 동참하셨습니다.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3절).
첫 창조 사역은 성부 하나님의 단독 사역이 아니라 삼위 하나님의 공동 사역이었습니다. 성부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셨으나 성자 예수님을 통하여 - ‘그로 말미암아’ - 하셨습니다. 그리고 창세기 1:2에 하나님의 영이 수면에 운행하셨다는 언급을 통해 알 수 있듯이, 성령 하나님 또한 창조 사역에 관여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새 창조 사역을 하십니다.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4절).
세상에 빛을 창조하신 말씀 하나님이 어두움 속에 있는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즉 새롭게 창조하기 위해 빛으로 오셨다고 요한은 증언합니다. 그런데 이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였습니다(5절). 그러면 구체적으로 누가 깨닫지 못한 걸까요?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나니 …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9∼11절).
로고스가 ‘자기 땅’에 왔는데, ‘자기 백성’이 깨닫지 못했습니다. 여기 ‘자기 땅’과 ‘자기 백성’은 각각 ‘팔레스타인’과 ‘유대인’을 가리킵니다. 하나님께서는 수천 년 동안 아브라함의 언약과 다윗의 언약 등을 통해서 메시아를 이 땅에 보내겠다고 끊임없이 약속하셨고 그 약속대로 메시아가 자기 땅, 자기 백성에게 왔건만 팔레스타인에 사는 자기 백성이라고 하는 유대인들은 그분을 알아보지 못했고 그래서 그분을 영접하지 않고 철저히 배척했습니다.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십자가에 달려 죽게 했습니다. 그래서 요한복음에서 이 유대인이란 말이 매우 부정적으로 사용됩니다. 육신적으로는 아브라함과 야곱의 후손이지만 예수님을 거부함으로써 하나님의 백성과 자녀가 되는 자격을 상실한 자를 ‘유대인’이라고 부릅니다. 반면에 유대인 가운데 예수님을 받아들여서 그분을 믿음으로 참 하나님의 백성이 된 자를 ‘이스라엘’이라고 부릅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은 유대인에 반해 긍정적인 표현입니다.
자칭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하는 유대인들이 메시아를 영접하지 않은 것이 첫 번째 스캔들이라면 이어지는 12절에는 두 번째 스캔들이 언급됩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헬라어 원문과 비교하면 한글 개역개정판에는 두 단어가 빠져있는데, 원문에 보면 역접 접속사 그러나를 뜻하는 ‘데’가 있습니다. 그래서 이 유대인들과 대조되는 참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을 여기 소개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 생략된 단어는 ‘누구든지’란 뜻을 지닌 ‘호소이’입니다. 그래서 유대인의 입장에서 하나님의 자녀는 자기들인데 유대인이냐 아니냐와 관계없이 ‘누구든지’ 예수님을 영접하기만 하면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는 유대인의 입장에서는 엄청난 스캔들입니다.
여기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방법으로 요한이 제시한 ‘영접’이란 가정에서 사용하는 언어로 손님을 집안에 모셔 극진히 대접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영접한다’(헬. 람바노)라는 말은 예수님에 대한 어떤 사실들을 지적으로 받아들이는 것뿐 아니라 그분과 인격적으로 친밀하게 관계를 맺는 것을 뜻합니다.
12절이 인간적인 측면에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방법을 제시했다면, 이어지는 13절에는 이를 신적 측면에서 설명합니다.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
여기 혈통, 육정, 사람의 뜻으로 나는 것은 자연적 출생을 의미합니다. 이런 출생이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의 출생(즉, 중생)을 해야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이어지는 14절에 요한은 우리를 하나님께로부터 나게 하기 위해서 말씀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성육신하셨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사도가 성육신을 언급하면서 “말씀이 ‘사람’(man)이 되었다, 혹은 말씀이 ‘몸’(body)을 취했다”라고 하지 않고 말씀이 ‘육신’(flesh)이 되었다”라는 표현을 사용한 것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는 영은 거룩하고 육은 부정하다는 헬라의 이원론 사상에 빠져 예수님께서 육신을 입고 오신 것을 부인했던 가현설주의자들(Docetists)의 주장을 반박하기 위한 것입니다. 사실 로고스가 육신이 되었다는 말은 헬라 세계에 폭탄을 터뜨리는 것입니다. 그것도 핵폭탄을 터뜨리는 것입니다. 플라톤의 이원론적 사고에서 무엇이 본질이냐 하는 것은 굉장히 중요한 문제입니다. 그들에게 본질은 비물질적인 것입니다. 그런데 로고스는 이데아의 본질에 해당됩니다. 그러므로 물질인 육체를 철저하게 비본질적이고 악한 것이라고 가르치는 헬라 사상에 비추어 볼 때 로고스가 육신이 되었다는 말은 헬라인들의 근간을 흔드는 말이었을 것입니다.
(※ 본 칼럼은 아래 책을 참고하여 쓴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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