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인의 함정, 이웃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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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인의 함정, 이웃사랑!

 

동서고금을 막론하여 진리처럼 통하는 것이 있다. 이것이면 모든 종교가 통합을 하자고 하는데 어려움이 없다. 목회자들의 동의(WCC & NCCK가입 등)를 이끌어 내는 것은 물론 세상 사람들도 감동을 받는다. 목회자가 어떤 설교를 하였든지 그 내용으로 결론을 맺으면 사랑 많은 목회자로, 성경을 실천하는 목회자로 믿어준다. 그것은 곧 이웃사랑이다.

 

1. 예수님은 누구신가

 

그러나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는 이웃 사랑은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이해되고 원하는 그 이웃사랑을 말하는 것일까? 그렇게 쉽게 이웃에게 무엇인가를 주고 마음을 사게 되면 성경을 지키는 것이고 구원에 이르는 것일까? 이 말씀을 이해하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신지 알아야 한다.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을 믿지 못하고 인간 예수로만 인정한다면 성경을 절대 진리로 믿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 시대에 가장 미혹을 받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하나님도 예수님도 성령님도 전하지만 성경에 기록된 대로 가르치지 않고 믿지 않는데 문제가 있다.

 

그는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형상이시오 모든 피조물보다 먼저 나신이시니 만물이 그에게서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왕권들이나 주권들이나 통치자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 그는 몸인 교회의 머리시라 그가 근본이시오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신이시니 이는 친히 만물의 으뜸이 되려 하심이라”(1:15-18)

 

예수님은 비록 육체를 입고 2천 년 전에 이 땅에 오셨으나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형상이시며 세상이 창조되기 전부터 계셨고 만물이 그에게서 창조되었음을 성경은 분명하게 증언하고 있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그리스도를 위한 것이며 그리스도는 모든 것의 근본이시며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신 분이다. 모든 만물 가운데 그리스도보다 더한 존재는 없다. 이러한 사실을 기초로 믿지 않으면 성경은 엉뚱한 해석을 할 수 밖에 없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님은 각기 자리와 하시는 사역이 다르나 죄가 전혀 없으신 동일한 본질이시며 본체이시고 영광이시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형상이신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친히 드러내셨고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1:14a)"하셨다. 예수님을 본 자는 곧 하나님을 보는 것과 같았으나 성령 하나님이 그들 가운데 임하시고 그들이 충만함(1:3-4)을 입기 전에는 제자들조차 알아보지 못했다.

 

너희가 나를 알았더라면 내 아버지도 알았으리로다 이제부터는 너희가 그를 알았고 또 보았느니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은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서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14:7, 9, 10)

 

이 시대는 다를까?

 

2.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

 

누가복음 10장에는 예수님이 칠십 인의 전도대원을 파송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예수님은 전도자들에게 전도자로서 먼저 구해야 할 것과 전도자의 자세와 전도자가 전해야 할 내용 등 기본에 대하여 가르쳐 주셨다. 전도자들은 그대로 순종하였으며 놀라운 기적을 경험한 후 예수님께 전도보고를 드렸다.

 

칠십 인이 기뻐하며 돌아와 이르되 주여 주의 이름이면 귀신들도 우리에게 항복하더이다”(10:17)

예수님은 그들의 보고를 들으신 후 그 모든 상황을 이미 알고 계셨다고 말씀하시며 예수님은 칠십 인의 전도자들에게 뱀과 전갈을 밟으며 원수의 모든 능력을 제어할 권능을 주었으니 너희를 해칠 자가 결코 없으리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고 말씀하셨다.

 

전도자가 귀신을 쫓아냈다는 것은 대단한 일이다. 자랑할 만한일이며 소문이 나서 많은 사람들에게 인기를 누릴 일이다. 이 시대의 사역자들이나 교인들이 원하는 사역 아니겠는가. 그러나 예수님은 그러한 것에 관심이 없으셨다. 칠십 인의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예수님의 관심과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은 한결같다. 죄로 말미암아 생명을 잃어버린 하나님의 자녀들이 예수를 믿음으로 하늘나라 생명록에 기록되어 영생과 부활을 얻기 바라는 것이다.

 

내가 하늘에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 하시니라”(6:38-40)

 

3. 내 이웃이 누구니이까?

 

칠십 인의 전도 보고 후에 익명의 율법교사 이야기가 나온다. 그가 예수님께 나온 이유에 대하여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어떤 율법교사가 일어나 예수를 시험하여 이르되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10:25)

 

그는 예수님을 시험하기 위해 나왔으며 그 시험의 내용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느냐는 것이었다. 영생에 관한 것은 모든 인간에게 가장 본질적이고도 중요한 질문이다. 그런데 율법교사는 중요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시험하기 위해서 나온 것이다. 이를 알면서도 예수님은 그에게 역으로 질문을 하셨다.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네가 어떻게 읽느냐라고 하셨을 때 그는 율법교사 답게 대답하여 이르되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10:26-27)라고 자신 있게 답하였다.

 

그 때 예수님은 네 대답이 옳도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 하시니 그 사람이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예수께 여짜오되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니이까(10:29) 라는 그의 질문에 다음과 같이 답하셨다.

 

1) 강도 만난 자는 누구인가?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매 강도들이 그 옷을 벗기고 때려 거의 죽은 것을 버리고 갔더라(10:30)

 

예수님께서 대화하고 있는 대상은 율법교사다. 그는 구약의 말씀을 너무도 잘 알고 있는 자로서 예수님이 이 말씀을 하셨을 때 그의 마음이 겸손하였다면 예수님이 하시는 이 말씀을 알아들을 수 있었을 것이다. 이사야 선지자를 통하여 하나님을 거역하고 떠난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한 책망의 말씀을 모를 리 없었을 것이다. 곧 자신의 모습이었으나 깨닫지 못했다.

 

하늘이여 들으라 땅이여 귀를 기울이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자식을 양육하였거늘 그들이 나를 거역하였도다  소는 그 임자를 알고 나귀는 그 주인의 구유를 알건마는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나의 백성은 깨닫지 못하는도다 하셨도다  슬프다 범죄한 나라요 허물 진 백성이요 행악의 종자요 행위가 부패한 자식이로다 그들이 여호와를 버리며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를 만홀히 여겨 멀리하고 물러갔도다  너희가 어찌하여 매를 더 맞으려고 패역을 거듭하느냐 온 머리는 병들었고 온 마음은 피곤하였으며  발바닥에서 머리까지 성한 곳이 없이 상한 것과 터진 것과 새로 맞은 흔적뿐이거늘 그것을 짜며 싸매며 기름으로 부드럽게 함을 받지 못하였도다”(1:2-6)

 

강도 만난 자는 곧 하나님을 떠난 인생을 의미한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도 그리스도 밖에 있었을 때의 참담한 상태를 말씀하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지금까지 하나님을 떠나 살고 있는 불쌍한 영혼들을 의미한다. 생각도 병들었고 온 마음은 피곤하여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새로 맞은 흔적뿐인데도 하나님께로 돌아올 생각을 못한다. 돌아왔다고 하면서도 여전히 불신자의 상태에 있는 교인들은 어떠한가? 교회가 이 사실을 직면하도록 가르치지 않는다면 어디에 가서 생명의 말씀을 들을 수 있겠으며 고침 받을 수 있겠는가?

 

2) 강도는 누구인가?

 

강도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아담과 하와를 유혹한 사탄이요, 지금도 사람의 생각을 통해 역사하고 있는 마귀다.

 

마귀가 벌써 시몬의 아들 가롯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더라”(13:2)

 

예수님은 유대의 종교지도자들을 향하여 다음과 같이 책망하셨다.

 

어찌하여 내 말을 깨닫지 못하느냐 이는 내 말을 들을 줄을 알지 못함이로다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대로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그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그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라”(8:44)

 

예수님이 선포하신 이 말씀이 유대의 종교지도자들에게 얼마나 충격이었겠는가?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 때부터 하나님께 택함 받은 선민이라는 특권의식에 사로잡힌 유대인 중에서도 백성들로 하여금 존경을 받으며 최고의 권위와 권세를 누리며 살아가는 종교지도자들을 향해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다고 하니 예수를 죽일 계략을 세우고 죽이는 것은 당연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주님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으시고 담대히 선포하셨다. 인간이 마귀의 사슬에 매여 있는 것 이는 변개할 수 없는 사실이기 때문이다. 그 사슬에서 풀어 자유하게 하시려고 이 땅에 오셨기 때문이다.

 

이 시대는 다를까? 인간 중심한 학문을 하는 사람들, 하나님 보다 사람을 먼저 생각하는 사람들은 목사라 해도 이와 같은 복음을 전할 수 없다. 생업을 위해 목회를 하거나 비겁해도 못 전하고 불편한 관계가 될까봐 두려워도 전할 수 없다. 평안한 삶이 깨어질까봐 두려운 자도 전하지 못한다. 그러나 생명을 살리기 위해서는 인간의 실존에 대해 반드시 사실대로 전해야 한다. 전도는 말로 하는 것이 아니라 삶으로 보여서 하는 것이라는 그럴싸한 말이 세상에서는 통할지 모르겠으나 하나님의 평가는 어떠실지 두려운 일이다. 

 

3) 강도만난 자의 이웃은 누구인가?

 

강도만난 자의 이웃은 선한 사마리아인의 모습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시다. 예수님이 유대의 종교지도자들을 향해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다고 하셨을 때 열을 받은 그들이 예수님을 향해 이렇게 모욕하였다.

 

유대인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우리가 너를 사마리아 사람이라 또는 귀신이 들렸다 하는 말이 옳지 아니하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나는 귀신 들린 것이 아니라 오직 내 아버지를 공경함이거늘 너희가 나를 무시하는도다 나는 내 영광을 구하지 아니하나 구하고 판단하시는 이가 계시니라”(8:48-50)

 

예수 그리스도는 강도만난 인간을 위해 하나님으로부터 보냄을 받으시고 이 세상에 오셨다. 자신의 전부로 죄인인 우리가 하나님께로 갈 수 있는 구원의 길이 되셨다. 하나님의 이 사랑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입은 자들은 마음과 뜻과 목숨을 다해 하나님을 경외하게 된다. 우리의 이웃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전심으로 사랑하게 된다. 그런데 죄와 허물로 죽었던(2:1)인간이 어떻게 하나님을 경외할 수 있겠는가. 예수님을 내 몸처럼 사랑하고 그 사랑으로 이웃을 사랑할 수 있을까.

 

만군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영으로 되느니라”(4:6b)

 

그 모든 일을 가능하게 하시는 분은 성령님이시다. 이 진리의 말씀이 믿어지고 삶으로 살아낼 능력을 주시는 것이다.

 

4. 결론

 

성경 66권 전체의 가르침은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이다. 주변과 세계에 살고 있는 수많은 이웃 가운데 가장 먼저 사랑해야 할 이웃은 강도만난 나를 위해 태어나실 때부터 짐승 취급받으며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시다. 예수 그리스도는 밥 한 끼를 원하시는 것이 아니다. 화려한 궁궐을 지어달라고 말씀하지 않으신다.

 

나의 계명을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14:21)

 

예수님은 계명을 지키는 것이 우리의 이웃으로 오신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말씀을 전하는 자들은 전하기에 불편한 말씀일지라도 주께서 명하셨으면 전해야 한다. 위장된 평화를 깨고 진리 안에서 참된 평화를 얻기까지 순종하는 것이 우리의 이웃으로 오신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이다!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 그 사랑을 하게 되면 이웃을 넘어 원수까지도 사랑할 힘을 주신다. 할렐루야!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려고 온 줄로 아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도리어 분쟁하게 하려 함이로라 이 후부터 한 집에 다섯 사람이 있어 분쟁하되 셋이 둘과, 둘이 셋과 하리니 아버지가 아들과, 아들이 아버지와, 어머니가 딸과, 딸이 어머니와, 시어머니가 며느리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분쟁하리라 하시니라”(12:51-53)


박온순 목사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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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3

상수리나무님의 댓글

  • 상수리나무
  • 작성일
이 마지막 때에 '사람의 사랑과 자기 의'가 아닌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를 널리 전하는 외치는 자의 목소리가 되시기를 기도합니다. !

마라나타님의 댓글

  • 마라나타
  • 작성일
본문은 율법사가 내가 그를 사랑함으로 영생을 얻게할 내(율법사 자신)  이웃이 누구냐고 물은 것입니다.
근데,  1.겅도만난 자는 누구인가?2.강도는 누구인가? 3.강도만난자의 이웃은 누구인가?  선한 사마리아인이다. 예수는 선한 사마리아인의 모습으로 오셨다고 하시면 도대체 율법사가 물었던 율법사의 이웃은 누구란 것인가요? 그 답을 말하는 것이 설교자의 몫(해석)  아닌가요?

사랑과공의님의 댓글의 댓글

  • 사랑과공의
  • 작성일
마라나타님 닉네임을 보니 주님 오심을 매우 기다리시는 성도님이시군요. 저 또한 하루하루 주님 오심을 기다리는 그리스도인입니다.
참으로 반갑습니다.

마라나타님은 본문의 핵심적이고도 매우 중요한 질문을 해주셨습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린다면 그(율법사)가 질문한 “그 사람이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예수께 여짜오되 그러면 내 이웃은 누구니이까(눅10:29)”에 대한 예수님의 답변은 “그가 나다!”입니다. 네가 사랑해야 할 이웃은 너를 위해 이 땅에 짐승취급 받으며 너를 찾아온 나(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해야 살 수 있어, 영생을 얻을 수 있다!” 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또한 나는 너의 시험의 대상이 아니며, 무엇을 해서 영생을 얻는 것이 아니다, 라는 말씀의 의미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네가 먼저 너를 강도(마귀)에게서 구원하기 위해 하늘로부터 너를 찾아온 네 이웃(예수 그리스도)을 사랑하고 그 사랑으로 강도 만난 너의 또 다른 이웃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율법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신6:5) 이웃을 사랑하라(레19:18)는 말씀을 인용하였을 때 예수님은 “네 대답이 옳도다 이를 행하라 그리하면 살리라 ”(눅10:28)고 말씀하셨습니다. 즉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해야 산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살리라(헬, 자오/ 생명, 살다. 살아 있는)” 단어와 동일하게 사용된 말씀을 보면 좀 더 이해가 쉬울 것입니다.

“또 하나님 앞에서 아무도 율법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지 못할 것이 분명하니 이는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헬, 자오)하였음이라(갈3:11)”

율법사와 예수님과의 대화를 통해서 알 수 있듯이 율법사가 아무리 성경에 능통한 듯해도 육은 살아있으나 그의 영이 죽어 있는 상태입니다.  모든 인간이 그렇듯이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이 되어 있어 아무리 율법에 대해 능통해도, 율법과 선지자들을 통해 기록된 예수님이 오셨어도 그는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또한 예수님이 그를 향해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하셨는데 이를 깨닫지 못하니까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자꾸 포장을 합니다. 이것이 모든 인간의 모습입니다. 

죄 가운데 출생한 인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습니다. 이 복음이 전 존재적으로 믿어지게 되면 오히려 율법을 지키게 됩니다. 기쁘고 즐거운 마음으로 자원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의 법을 사랑하게 되고 즐겨 행하게 됩니다. 구원을 받으려고 이웃에게 선을 베푸는 것이 아니라, 나 같은 죄인을 위하여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그 사랑과 그 은혜가 너무도 감사하여 전부를 드려 하나님을 사랑하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이웃을 사랑해도 늘 목마름을 느낍니다. 어떤 일을 하든지 자랑할 것도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순간 하나님의 소유가 되었는데 무엇을 주장할 수 있을까요? 또한 하나님의 것으로 사는 자가 되었기에 가난한 자 같으나 부요한 자로, 무명한 자 같으나 담대하게 살아갑니다. 오직 관심은 하나님의 나라와 의와 하나님의 거룩하신 이름이 높임을 받는 것과 이를 알지 못하는 자들을 일깨우고 주님 앞으로 인도하고 싶은 소망 밖에는 없습니다. 사람이 그렇게 변할 수 있다는 것이 놀라울 뿐이지요.

세상에 대한 부귀영화 권세, 명예, 지식, 세상의 사람들이 추구하는 그런 것과는 상관없는 새로운 목마름이 있습니다. 그러나 함께 하시는 주의 성령님을 통하여 위로를 받습니다. 다시 힘을 얻습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마5:6)

그렇게 이미 임한 하나님 나라를 누리며 아직 도래하지 않은 하나님 나라를 소망하며 살아가게 되지요. 이 귀한 은혜가 마라나타님에게도 충만하심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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