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전도사님의 변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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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완구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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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화론(다윈주의); 자유주의 신학에 날개를 달다-

이오시프 스탈린은 독실한 정교회 신자였던 어머니의 영향으로 10살 때인 1888년부터 그루지야 고리(Gori)와 트빌리시(Tbilisi)의 신학교에 입학해 11년간 성직자 수업을 받았다. 그러나 그는 1899년 러시아정교회의 신부가 되기를 포기하게 된다.
당시 스탈린은 마르크스 주의에 심취해서 정교회의 신부가 되는 것을 포기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실제로 스탈린이 무신론자가 되어 막시즘에 빠진 가장 중요한 배경에는 바로 다윈주의 사상이 있었다.


젊은 스탈린이 러시아 정교회의 신부가 되고자 신학교에서 공부할 때 조셉이라는 친구와 종교에 관해 토론을 하면서 다음과 같은 대화를 나눈다.

<조셉은 내 말을 다 듣고는 잠시 침묵하다가 이렇게 말했다. 
"있잖아, 그들이 우리를 가지고 놀고 있어. 하나님은 없단 말이야......"
나는 그 말을 듣고 깜짝 놀랐다. 그런 소리는 처음 들어본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어떻게 너는 그런 말을 할 수 있니?" 내가 소리쳤다.
"내가 너한테 책을 한 권 빌려 줄께. 그 책이 이 세계와 모든 생물이 네가 상상하는 것과 아주 다르다는 것과, 하나님에 관한 이 모든 논의가 순전히 넌선스라는 것을 알려 줄 거야" 조셉이 말했다
"그게 무슨 책인데" 내가 물었다
"다윈이야. 네가 꼭 읽어야 해" 
조셉은 강조하며 답했다.>

그 후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1922년 스탈린이 소련공산당 서기장에 오르면서 러시아정교회는 성직자들의 설교가 금지되고 교회 재산이 몰수되는 박해를 받았다.
그리고 이미 무신론자가 된 스탈린은 러시아를 공식적인 무신론 국가를 만들기 위해 자기 국민을 문자 그대로 수백만 명이나 살해했다.

다윈이 세계관에 끼친 영향은 이토록 대단했다.

19세기 말에 다윈주의가 대서양을 넘어 미국 연안에 도착할 때 다윈주의는 일단의 학자들로부터 환영을 받았고, 그들은 그 사상에 기초해서 철학 학파를 세웠다.
철학적 실용주의(philosophical pragmatism)라 불리는 이 학파의 핵심 가정은, 만일 생명이 진화한 것이라면 인간의 정신도 진화했을 것이고 그렇다면 모든 인문과학-심리학.교육학, 법학, 심지어 신학까지도-이 거기에 기초해서 다시 세워져야 한다는 것이었다.

실용주의는 유일한 미국의 자생적 철학인데(다른 대부분의 철학은 유럽에서 수입한 것이다) 바로 그런 이유로 굉장한 영향력을 발휘해 왔다.
철학적 실용주의를 자세히 고찰해 나가면, 다윈주의가 미국인의 사고방식뿐 아니라 미국 사회 제도의 구조까지 바꾸게 된 경위를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철학적 실용주의를 개발한 주요 인물은 존 듀이(John Dewey), 윌리엄 제임스(William James), 찰스 샌더스 퍼스(Charles Sanders Perce), 올리버 웬델 홈즈 2세(Oliver Wendell Holmes. Jr)등이다.
그들의 목표는 다윈의 자연주의를 완전한 세계관으로 진전시켜 전통적 종교에 대항하는 것이었다.
윌리엄 제임스는 어떤 종교가 행복이나 의미를 느끼게 해 준다면, 그것은 "참된종교" 라고 했다.


다윈주의는 단번에 전통적 유신론과 자유주의적 유신론 모두를 뒤엎었다.
전통적 신학에서는, 초월적 하나님이 자신의 설계와 목적에 따라 세계를 창조한다. 다른 한편, 자유주의 신학에서는 내재적 신성이 세계 역사의 발전을 통해 스스로 그 목적을 외면화한다.
어느 편이든, 정신이 물질에 우선하며 물질세계의 발전을 추진하고 지도한다.
다윈은 이 질서를 뒤엎었다.
그의 이론에 의하면 정신은 순전히 자연의 힘의 산물일 뿐이었다.

이처럼 생물학에서 시작된 진화론이 철학과 종교에까지 영향을 미치면서, 슐라이어마허에 의해 시작된 자유주의 신학은 날개를 달게 되었다.
이들은 과학으로 증명할 수 없는 성경 내용은 실제 사건이 아닌 신화로 생각했다. 그러니 천지창조, 홍해의 기적, 예수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 부활과 승천 등 기독교의 핵심 교리들을 전혀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이런 다윈주의적 사고가 상당히 신실하고 근본주의적인 신앙을 가진 목사님들에게도 영향을 미치고 있었던 것이라는 점이다.
이 목사님들은 진화론을 100% 신뢰하지는 않았다 하더라도, 진화론적 칭조론이 어느 정도 그 분들의 신학 바탕에 깔려 있었다.
유신론적 진화론이라고 할까? 아니면 진화론적 유신론이라고 할까?


한국 선교의 개척자인 언더우드 목사님 역시 이러한 시대적 조류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그는 세브란스의 전신인 연희전문학교에서 진화론을 가르치기도 했으며, 이는 그의 스승이었던 에이 티 피어선(A.T. Pierson) 목사의 영향과도 맞닿아 있다. 언더우드 선교사님은 럿거스 대학교 시절의 스승이었던 에이 티 피어슨(Arthur T. Pierson)목사님을 존경하였으며 그 분의 영향을 많이 받았던 것이다.
피어선 목사님 본인은 다윈주의에 단호히 맞선 진리의 파수꾼이었으나, 그가 복음 전파를 위해 열어젖힌 '초교파적 연합'의 문은 역설적이게도 후대의 타협주의자들이 다윈주의와 자유주의라는 가라지를 들여오는 통로가 되고 말았다. 파수꾼이 사라진 연합의 성벽은 인본주의의 침투를 막아내지 못한 것이다.

피어선 목사의 제자이자 세계 에큐메니칼 운동의 산실인 1910년 에든버러 선교대회를 개최한 존 모트 역시 당시 예수회(프리메이슨)의 후원을 받고 있었다는 점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1910년 당시의 선교대회는 "우리 세대 안에 세계 복음화를"이라는 표면적으로는 순수한 복음주의적 열정으로 시작되었으나, 진리보다 연합을 우선시했던 그 구조적 틀은 훗날 WCC와 같은 혼합주의적 기구로 변질되는 발판이 되었다. 결국 다윈주의라는 가라지는 신실한 선교사들의 열정 뒤편에서 자유주의 신학이라는 이름으로 자라나 기독교의 근간을 흔들었다. 


우리가 역사를 통해 깨닫는 분명한 사실은, 복음의 유일성과 성경의 절대 진리를 놓친 채 진행되는 그 어떤 연합이나 발전도 결국은 신앙의 파선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는 엄중한 경고다.

이완구 권사 (맑은샘내과 원장, 의학박사)

추신-언더우드 선교사님이 다니셨던 럿거스 대학은 본래 목회자 양성을 위해 세워진 경건한 개혁교회의 요람이었다. 그러나 그 거룩한 학문의 전당조차 다윈주의라는 시대적 파고를 완전히 막아내지는 못했다. 안타깝게도 오늘날의 럿거스는 과거의 신학적 정체성을 거의 잃어버리고 뉴저지 주립대학교(The State University of New Jersey)로 바뀌었다. 목회자 양성이라는 본래의 설립 목적은 사라지고 거대한 세속 대학이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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