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너지는 경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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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완구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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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린성찬의 신학적 오류와 그 위험성)

“이러므로 너희 중에 약한 자와 병든 자가 많고 잠자는 자도 적지 아니하니.”(고린도전서 11;30)


최근 감리교 제36회 총회 장정개정위원회에서 성찬 참여 자격을 확대하려는 논의가 있었다는 소식이 들린다. 세례받지 않은 사람들도 성찬에 참여할 수 있게 하자는 움직임이 일부에서 제기되고 있다는 것이다.
겉으로 보기에는 포용과 열린 마음의 표현 같지만, 그 속에는 교회의 신앙적 뿌리와 성례의 거룩함을 흔드는 심각한 문제가 숨어 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제정하신 성례는 세례와 성찬 두 가지가 있다.
세례는 죄 사함과 거듭남의 표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가 하나님의 언약 공동체 안으로 들어오는 입문 성례이다. 예수님은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마 28:19)라고 명하셨고,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막 16:16)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성찬은 이미 세례로 교회의 일원이 된 자들이 주님의 몸과 피를 기념하며 그 은혜를 누리는 성례이다. 성찬을 통해 성도는 그리스도와 연합하고, 그분의 죽으심과 부활을 믿음으로 새롭게 붙잡는다.

초대교회는 이 성찬의 거룩함을 철저히 지켜왔다.
1세기 말의 문헌인 "디다케"는 “주님의 이름으로 세례받은 자가 아니면 너희의 유카리스티아를 먹거나 마시지 못하게 하라. 거룩한 것을 개들에게 주지 말라”고 명한다. 예배 중에도 교리 입문자(catechumen)들은 설교 이후 퇴장하고, 오직 세례받은 신자들만이 성찬에 참여했다. 성찬은 단순한 공동 식사가 아니라, 구속의 은혜에 참여한 자만이 누릴 수 있는 언약의 식탁이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의 성찬 무질서를 꾸짖으며 이렇게 경고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주의 떡이나 잔을 합당치 않게 먹고 마시는 자는 주의 몸과 피를 범하는 죄가 있느니라. 주의 몸을 분별치 못하고 먹고 마시는 자는 자기의 죄를 먹고 마시는 것이니라. 이러므로 너희 중에 약한 자와 병든 자가 많고 잠자는 자도 적지 아니하니.”(고전 11:27–30)
이 말씀은 교회 역사 전체에 걸쳐 성찬 참여 자격의 기준으로 해석되어 왔다. 초대교회의 대표적인 교부라고 알려진 키푸리안과 터툴리안은 이 구절을 “하나님의 거룩한 임재를 모독하는 자에게 육체적 징계가 임한다”는 의미로 이해했고, 중세 교회는 이를 근거로 고해 없는 성찬 참여를 중대한 죄로 다스렸다.
종교개혁자 루터는 “성찬은 믿는 자에게는 생명이지만, 믿지 않는 자에게는 심판이 된다”고 했고, 칼뱅은 “믿음 없이 성찬에 나아가는 자는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받되, 그것이 그에게 생명이 아니라 죽음이 된다”고 경고했다. 교회사 전반에 걸쳐 성찬은 은혜의 수단이자 동시에 하나님의 징계가 임할 수 있는 자리로 인식되었다.

그럼에도 오늘날 일부 진보적인 목회자들은 예수님께서 오병이어의 기적이나 식탁 교제를 통해 다양한 사람들과 함께 하셨다는 점을 들어, 왕따되는 느낌이나 소외감을 주지 않기 위해 세례 여부와 상관없이 모든 사람에게 성찬을 허용하려 한다. 그러나 이것은 성찬을 관계와 포용의 상징으로만 축소시킨 인본주의적 왜곡이다. 성찬은 결코 아무 준비 없이 참여할 수 있는 행위가 아니다. 사도 바울이 “주의 몸을 분별치 못하고 먹고 마시는 자는 자기의 죄를 먹고 마시는 것이라”(고전 11:29)고 한 것처럼, 성찬의 의미를 알지 못한 채 떡과 잔을 받게 하는 것은 그 사람으로 하여금 죄를 짓게 하는 일이다.

고린도전서 11장 27–30절은 단순히 “신앙 없는 사람이 성찬을 받으면 안 된다”는 규칙이 아니라, 하나님의 거룩한 임재를 경외하지 않고 성찬에 참여하는 것 자체가 영적·육체적 심판을 불러올 수 있다는 경고이다. 바울이 사용한 헬라어 ‘아낙시오스’는 ‘그 자격에 합당하지 않게, 경솔하게’라는 뜻으로, 신앙 없이, 죄를 회개하지 않고, 성찬의 의미를 분별하지 못한 채 참여하는 것을 가리킨다. 따라서 단순히 형식적으로 따라 하는 참여나, 그 의미를 모르는 참여도 ‘합당하지 않은 참여’에 해당한다.
그러므로 만약 교회가 열린 성찬을 시행하려 한다면, 최소한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분만 성찬식에 참여하시기 바랍니다”라는 분명한 안내가 있어야 한다. 그런 권면조차 없이 모두에게 성찬을 허용하는 것은, 목회자가 성도들에게 스스로 죄를 짓게 만드는 영적 무책임이며, 하나님의 거룩한 성례를 세속적 감정의 차원으로 끌어내리는 일이다. 성찬의 자격을 흐리게 하는 것은 사람을 위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그 영혼을 죄의 자리로 내모는 행위가 된다.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성찬은 아무나 참여할 수 있는 열린 잔치가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세우신 언약의 식탁이며,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에 속한 자들이 신앙과 회개의 마음으로 참여하는 자리이다. 교회가 그 경계를 허물 때, 성찬은 더 이상 은혜의 수단이 아니라 심판의 통로가 된다. 바울의 경고는 오늘날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울린다.
“이러므로 너희 중에 약한 자와 병든 자가 많고 잠자는 자도 적지 아니하니.”(고린도전서 11;30)
교회가 진정 사람을 사랑한다면, 그들에게 먼저 복음을 전하고 세례로 초대해야 한다. 세례 없는 성찬은 복음의 확장이 아니라 복음의 왜곡이다. 성찬은 전도의 수단이 아니라, 복음에 응답한 자들이 감사로 참여하는 은혜의 결실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거룩한 질서를 세상적 포용으로 대체하려 해서는 안 된다.

지금 우리가 던져야 할 물음은 분명하다. “성찬 참여 자격의 확대, 과연 성경적인가?”
그리스도의 몸을 분별하지 못한 자들이 주의 식탁에 나아갈 때, 그 자리는 은혜가 아닌 심판의 자리가 될 수 있다. 하나님은 거룩하시며, 그분의 성례를 가볍게 다루는 교회를 결코 기뻐하지 않으신다. 교회가 세상에 맞추어 열린 성찬을 허용하는 순간, 그 식탁은 복음의 자리에서 심판의 자리로 변할 것이다. 지금이야말로 우리가 거룩한 성찬의 질서를 회복하고, “거룩한 것은 거룩한 자에게 주어져야 한다”는 진리를 다시 고백해야 할 때다.

이완구박사(맑은샘내과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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