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도 만난 자를 보았을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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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완구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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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관이라는 이름의 또 다른 폭력
하지만 그 환자의 눈에는 그것조차 마음에 들지 않았나 봅니다.
전화로 오라고 했으면 바로 봐줘야지 왜 순서가 밀렸느냐며, 30분이 넘는 시간 동안 접수대 앞에서 우리 실장님에게 입에 담을 수 없는 폭언과 모욕을 퍼부었습니다.
"싸가지를 어디에 두고 다니냐", "손님 응대를 왜 그따위로 하느냐", "당장 사과해라." "싸가지를 챙겨라" 등등, 대기실의 다른 환자들도 혀를 찼을 정도의 안하무인이었습니다. 참고로 실장님의 아들이 스물일곱 살입니다. 자기 아들보다 어린 대학생이, 어머니뻘 되는 분에게 '싸가지'를 챙겨라고 운운하며 대중 앞에서 모욕을 준 것입니다.
이야기를 듣고 저는 환자와 실장님을 진료실로 불렀습니다.
"이런 행동은 직원에 대한 모욕죄이자 병원 업무방해죄가 될 수 있다"고 경고하며 타일렀습니다.
하지만 환자는 당당했습니다. "그럼 경찰 부르세요!"
나는 그 환자에게 "이런 일로 경찰 불러서 업무방해나 모욕죄로 입건되면 평생 전과가 따라다니게 되는 것이다. 나이도 젊은데 이렇게 전과가 생기면 되겠느냐. 그냥 이쯤하고 집에 가라"고 여러 차례 설득했습니다. 그러나 그 환자는 "어디 경찰 불러 보세요." 하면서 아예 자리를 잡고 대기실에 서 있는 것이었습니다.
어쩔 수 없이 실장님을 통해 경찰서에 신고했고, 경찰이 출동했습니다. 하지만 원만하게 해결하길 권하는 분위기 속에서, 마음이 약하고 착한 우리 실장님은 "우리 병원에 오셨는데 마음 상하게 해서 죄송하다"며 도리어 먼저 고개를 숙였습니다. 그러나 가해자는 사과 한마디 없이 당당하게 나갔고, 상황은 그렇게 끝나는 줄 알았습니다.
잠시 후, 진료실 문을 열고 들어온 실장님이 참았던 눈물을 터뜨렸습니다.
"원장님, 저 이제 너무 억울하고 속상해서 더는 병원 일 못 하겠어요..."
가슴이 쿵 내려앉았습니다. 우리 병원의 살림을 도맡아 하는, 없어서는 안 될 베테랑 직원이 일을 그만두겠다고 할 정도로 정신적 폭력으로 인한 깊은 마음의 상처를 입은 것입니다.
저는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병원의 이미지를 위해 이 일을 원만하게 해결하는 것이 솔루션이라 생각했는데, 그것이 실장님에게는 아주 큰 상처가 되었다는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그 순간 제 가슴 깊은 곳에 묻어두었던 아픔이 밀려왔습니다.
과거에 제가 영생교회에서 목사의 이단성 문제를 장로들에게 제기했을 때가 생각났습니다. 장로들은 목사의 잘못을 빤히 알고 있으면서도, 오직 '교회의 평화'와 '교회의 이미지'만을 내세우며 제게 참으라고 강요했었습니다.
불의를 바로잡으려 했던 저를 철저히 외면하고 방관하던 그 거대한 벽 앞에서, 저는 말로 다 할 수 없는 깊은 소외감과 외로움을 겪어야 했었습니다. 정의의 편에 섰으나 철저하게 혼자가 되었던 그 참담한 고립감은 영혼에 깊은 상처를 남겼습니다.
만약 저마저 실장님에게 "병원을 위해 혼자 삭이고 참아달라"고 했다면, 실장님 역시 제가 느꼈던 그 지독한 소외감의 구렁텅이에 혼자 내던져졌을 것입니다. 그리고 저는 폭력을 방관하고 동조한 또 다른 가해자가 되었겠지요.
성경에는 유명한 사마리아인의 비유가 나옵니다.
누가복음 10장에서 한 율법교사가 예수님께 "내가 무엇을 해야 영생을 얻으리이까"라고 물었을 때, 예수님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는 율법의 핵심을 확인시켜 주십니다. 그러자 율법교사는 짐짓 자기가 옳다는 것을 드러내려고 다시 묻습니다. "그러면 누가 내 이웃입니까?"
이 질문은 자신이 사랑해야 할 이웃의 경계선을 긋고, 그 경계 밖의 사람들은 합법적으로 외면하겠다는 계산적인 태도였습니다. 이에 예수님은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 강도 만나 피 흘리며 쓰러진 사람의 비유를 드십니다. 그리고 종교적 정결함과 안위, 혹은 자신들의 명분을 핑계로 신음하는 자를 외면하고 반대편으로 피해 가버린 제사장과 레위인의 위선을 책망하십니다.
강도 짓을 직접 한 사람만 악한 것이 아닙니다. 쓰러져 신음하는 이웃을 보고도 자신의 안위와 평안, 조직의 이미지를 위해 외면하고 방관하는 것 역시 하나님 앞에서는 똑같은 죄입니다. '가장 작은 자' 한 사람에게 상처를 주는 행위는 하나님 앞에서 정말 심각한 죄이기 때문입니다.
이 비유의 끝에서 예수님은 질문의 패러다임을 완전히 바꾸어 질문하십니다.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어 주었느냐?"
예수님은 우리에게 "누가 내 이웃의 자격이 있는가"를 따지지 말고, "네가 지금 상처 입고 소외된 자의 이웃이 되어주고 있는가"를 물으십니다. 소외된 이웃을 돌보는 것, 그들의 아픔에 동참하는 것이야말로 율법의 완성인 진짜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진료를 즉시 중단시켰습니다. 그리고 제가 직접 112에 전화를 걸어 경찰을 다시 불렀습니다.
그리고 실장님의 이름으로 '모욕죄' 고소장을, 제 이름으로 '업무방해죄' 고소장을 직접 작성하여 정식으로 접수했습니다. 혹여나 조사 과정에서 실장님이 또다시 스트레스를 받을까 염려되어, 즉시 아는 변호사에게 전화를 걸어 형사 사건을 맡겼고, 정신적 피해에 대한 위자료 청구 민사소송도 함께 요청했습니다.
아마 그 대학생은 자기가 맑은샘내과에서 큰소리를 쳐서 이겼다고 착각하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며칠 후 자신의 집으로 배달될 법적 서류들이 얼마나 무거운 줄 모른 채 말입니다.
만약 이 일이 제 개인에게 일어난 일이었다면, 저는 미친 개에게 물린 셈 치고 훌훌 털어버렸을 것입니다. 고소하고 조서를 꾸미는 일들은 의외로 시간이 많이 들어 그 시간 때문에 더 중요한 일들을 하지 못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비록 고소인이라 하더라도 법에 휘말리면 심리적으로 큰 스트레스를 받게 됩니다. 그래서 웬만한 일들은 혼자 삭이고 그냥 넘어 갑니다.
하지만 내 울타리 안에서 나를 믿고 열심히 일해온 내 이웃, 내 직원이 짓밟히고 외로움에 우는 것을 더는 방관할 수가 없었습니다. 직원을 지키지 못하는 원장이 어떻게 환자의 건강과 생명을 온전히 지킬 수 있겠습니까.
오늘날 많은 크리스천들이 '사랑과 용서'라는 아름다운 명목 뒤에 숨어, 혹은 '은혜'라는 이름으로 불의를 방관하곤 합니다. 너 좋고 나 좋으면 그만이라는 식의 타협, 조직의 평화와 이미지를 위해 진짜 피해자의 목소리를 누르고 희생을 강요하는 것은 기독교의 참된 정신이 아닙니다. 그것은 피해자에게 영혼의 살인과도 같은, 결코 회복할 수 없는 참혹한 상처를 주는 행위입니다.
기독교의 진정한 정신은 불의에 침묵하는 비겁함이 아니라, 하나님의 엄격한 공의(Justice)를 바탕으로 한 사랑과 용서입니다. 불의를 바로잡고 약자를 보호하는 공의의 토대가 없을 때, 우리가 말하는 사랑과 은혜는 가해자를 비호하고 피해자를 고립시키는 '가짜 평화'에 불과합니다. 진정한 기독교적 사랑은 강도만난 이웃을 위해 위험과 손해를 무릅쓰고 불의의 벽에 맞서는 용기입니다.
제가 가장 외롭고 소외되었을 때 누군가 내 손을 잡아주길 바랐던 그 마음으로, 이제는 정신적 폭력 앞에 쓰러진 우리 실장님의 곁에서 공의를 행하며 끝까지 든든한 사마리아인이 되어 주려 합니다. 이 땅의 모든 일터와 교회에서, '은혜'라는 탈을 쓴 방관의 죄가 사라지고, 상처 입은 자를 온전히 치유하는 하나님의 참된 공의가 강물처럼 흐르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이완구 박사 (맑은샘내과 원장, 전 영생교회 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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