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도원을 빼앗긴 나봇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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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완구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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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봇의 포도원-상속자를 죽이고 빼앗는 교회 이야기

“네가 죽이고 또 빼앗았느냐.” (열왕기상 21; 19)

열왕기상 21장에는 나봇의 포도원 이야기가 나온다.
"그 후에 이 일이 있으니라 이스르엘 사람 나봇에게 이스르엘에 포도원이 있어 사마리아의 왕 아합의 왕궁에서 가깝더니" (왕상 21:1)
이스라엘의 왕인 아합은 나봇의 포도원이 자기 왕궁과 가까우니 그것을 사서 채소밭(정원)을 만들고 싶어 했다. 그래서 나봇에게 다른 더 좋은 포도원으로 바꿔주거나 돈으로 값을 치를테니 그 포도원을 자기에게 팔라고 제안했다. 그런데 나봇은 왕에게 포도밭을 팔지 않았다. 워낙 노른자 땅이라서 시간이 지나면 땅값이 더 오르기 때문에 비싸게 팔려고 고집을 부리는 것이 아니었다.  조상이 유산으로 준 땅을 남에게 팔지 못하도록 하나님이 명령하신 그 율법을 지키려는 숭고한 마음이 나봇에게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봇은 아합 왕에게 “내 조상의 유산을 왕에게 주기를 여호와께서 금하실지로다”(왕상 21:3)라고 말하면서 왕의 제안을 거절했다.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려는 신앙적 양심 때문에 그는 권력보다 말씀을 택했던 것이다.

그러나 어떻게 해서라도 나봇의 포도원을 갖고 싶었던 아합과 이세벨은, 로마 카톨릭이 종교재판을 열어 마녀사냥을 한 것처럼 나봇을 종교재판에 세웠다.

아합과 이세벨은 나봇을 힘으로 죽인 것이 아니었다. 먼저 금식을 선포하고, 이스라엘 장로들을 동원하고, 거짓 증인을 세워 철저하게 종교적 형식과 율법의 외형을 갖추었다. 평생 하나님을 경외하며 살아온 나봇은 오히려 “하나님과 왕을 저주한 자”라는 누명을 쓰고 성문 밖으로 끌려나가 돌에 맞아 죽었다.

이 과정에서 아무도 나봇을 변호하지 않았다. 나봇이 죄가 없고 이 사건이 조작되었다는 것을 알고 있는 사람들이 분명히 있었겠지만, 그들은 권력자를 대항하여 나봇을 변호하려 하지 않았다. 그냥 침묵했다.


십계명의 제9계명은 단지 “거짓말 하지 말라”는 소극적 금지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 안에는 억울한 이웃을 변호하라는 적극적 책임이 포함되어 있다. 누군가 거짓 증언으로 상처를 입고 있는데도, 진실을 알면서 침묵한다면 그것은 거짓에 동조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악은 거짓말하는 소수만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진실을 알고도 침묵하는 다수에 의해 더 견고해진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21장에서 포도원 소작인의 비유를 말씀하신다.

포도원 주인은 소작인들에게 밭을 맡기고 타국으로 떠났으나, 소작인들은 세금을 받으러 온 종들을 때리고 죽였다. 급기야 주인의 상속자인 '아들'이 오자, 그들은 "이는 상속자니 자, 죽이고 그의 유산을 차지하자"라며 아들을 포도원 밖에 내쫓아 죽여 버렸다.

나봇을 죽이고 포도원을 빼앗은 아합과 이세벨의 탐욕은, 주인의 아들을 죽이고 포도원을 통째로 삼키려 했던 소작인들의 섬뜩한 욕망과 정확히 닮아 있다. 이 비유 속 소작인들이 누구인가? 바로 당대의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 즉 종교 기득권자들이었다. 그들은 자신들이 포도원의 전권을 쥐었다고 착각하며, 진짜 주인인 예수님을 성문 밖으로 몰아내어 죽였다.

하나님이 주신 기업인 포도원을 목숨걸고 지키려 했던 신실한 상속자인 나봇은, 하나님의 나라이자 포도원인 이 땅의 참된 주인이시자 상속자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완벽한 예표이다. 

나봇이 아합과 이세벨이 동원한 거짓 증인들을 통한 종교 재판으로 죽임을 당했듯이, 예수님 역시 대제사장들과 산헤드린 공의회가 내세운 거짓 증인들의 모함과 종교재판을 통해서 십자가형을 받으셨다.

나봇이 하나님과 왕을 모독했다는 죄목을 뒤집어 썼듯이, 예수님의 죄목도 신성모독과 가이사(왕)에 대한 반역이었다. 그리고 나봇이 이스라엘 진영 안이 아닌 성문 밖으로 끌려 나가서 처참하게 피를 흘리고 죽은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예루살렘 영문 밖 골고다 언덕에서 피를 흘리고 죽으셨다.

 



이 오래된 나봇의 포도원 이야기는 오늘 한국 교회의 현실 속에서 내게 익숙한 장면이다.

나는 익산의 한 감리교회 담임 목사의 심각한 신학적 문제와 이단적 요소들을 성경적으로 지적하였었다. 진리를 지키는 일이 사람과의 관계를 유지하는 것보다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처음에는 조심스럽게 담임목사와 부목사, 장로들에게 권면했고, 개인적으로도 여러 차례 대화를 시도했다. 그러나 설교는 점점 더 복음의 본질에서 멀어졌다. 

그 목사는 예수님을 믿지 않는 이슬람에도 성령님이 임한다고 했고,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신 이유가 자연보호를 위해서라고 했다. 
뉴에이지 수양법인 관상기도를 최고의 기도라고 하면서 성도들을 미혹했고, 
사순절의 시작인 재의 수요일에는 손등에 재를 바르는 미신적인 행위를 했다.
카톨릭과 일치되기 위해 10월 첫째주일에는 세계성찬주일을 지켰다. 
세례교인들만 참여할 수 있는 성찬식에 예수님을 구주로 고백하지 않는 교회에 처음 나온 사람들까지도 참여시켰다. 

이런 해괴하고 이단적인 설교들과 종교행위들을 보고도 장로들은 아무런 이의도 제기하지 않았다.

그 교회는 내 장인어른이 평생 피땀 흘려 모은 재산을 바쳐 세운 교회였다. 장인어른은 한의원을 운영하시며 모은 거의 전부를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위해 드렸다. 물론 그것이 내게 어떤 세상적 권리를 준다는 뜻은 아니다. 다만 조상의 눈물과 기도, 신앙의 헌신이 스며 있는 그 영적 유산의 가치를 지켜야 할 책임감만은 내게 깊이 남아 있었다.

그러나 돌아온 것은 대화와 토론이 아니라 배척이었다. 그 교회 장로들 가운데 일부는 무엇이 문제인지 알고 있었을 것이다. 누가 옳고 누가 잘못되었는지 마음속으로는 알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들은 그냥 침묵했다. 그리고 그 침묵은 결국 잘못된 가르침을 보호하는 힘이 되었다.

결국 장로들은 나를 교적에서 삭제시켰다. 그들이 나를 교적에서 제거한 이유는 이단 문제를 제기하지 못하게 하고, 설령 잘못된 판단이 내려지더라도 항소할 자격 자체를 없애 버리기 위한 조치였다.


대학생 때 읽었던 조지 오웰의 『1984』라는 소설이 생각난다.
그 소설 속 전체주의 권력은 체제에 불편한 사람을 단순히 비난하지 않는다. 아예 기록에서 지워 버린다.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사람, 즉 ‘비존재(Unperson)’로 만들어 버린다. 논리로 반박할 수 없을 때 메신저의 존재 자체를 제거하는 것이다.

그런데 성경에도 이와 비슷한 장면이 있다.
요한복음 9장에서 날 때부터 소경 되었던 사람이 예수님으로 인해 눈을 뜨자, 유대 종교 지도자들은 기적보다 자신들의 권위를 더 중요하게 여겼다. 그들은 눈뜬 사람에게 예수님을 부인하라고 강요했다. 그러나 그는 담대히 말했다.
“내가 한 가지 아는 것은 내가 맹인으로 있다가 지금 보는 그것이니이다.”
유대 지도자들은 논리로는 그를 이길 수 없게 되자 권력을 사용하여 그를 출교시켜 버린다.
당시 출교는 단순히 예배당 출입 금지가 아니었다. 공동체 안에서의 권리와 관계를 모두 잃는 사회적 추방이었다. 쉽게 말하면 호적에서 파 버리는 것이다. 존재 자체를 부정당하는 일이었다.

그러나 요한복음 9장의 가장 아름다운 장면은 그 다음에 나온다.
사람들은 그를 쫓아냈지만, 예수님은 그를 찾아오셨다.

“예수께서 그들이 그 사람을 쫓아내었다는 말을 들으셨더니 만나사 이르시되 네가 인자를 믿느냐”(요 9:35)

이 말씀은 내게 깊은 위로가 된다. 사람들은 공동체 밖으로 내쫓았지만, 주님은 성문 밖으로 밀려난 자를 잊지 않으셨다. 나봇도 그랬다. 세상은 그의 억울한 죽음을 덮으려 했지만 하나님은 그의 피를 기억하셨다. 출교당한 소경도 그랬다. 종교 권력은 그를 지워 버리려 했지만 예수님은 그를 찾아오셨다.

가장 역설적인 사실은 나봇을 죽이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고, 오늘날 진실을 말하는 사람들을 공동체 밖으로 밀어내는 이들이 대부분 스스로 가장 경건하다고 믿는 종교 지도자들이었다는 점이다. 그리고 많은 평범한 사람들은 침묵하거나 동조했다. 그들은 자신들이 포도원을 지키고 있다고 믿었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엘리야를 통해 아합에게 물으셨다.
“네가 죽이고 또 빼앗았느냐.”

하나님은 언제나 성문 밖의 핏소리를 들으신다. 사람들은 기록에서 이름을 지우고, 교적에서 삭제하고, 공동체 밖으로 내쫓을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결코 그 이름을 잊지 않으신다.

예수님은 포도원 소작인의 비유를 마치신 후에 “그러면 포도원 주인이 올 때에 그 농부들을 어떻게 하겠느냐”라고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에게 물으셨다. 당대 종교 기득권자들의 입에서 나온 대답은 자명했다. 악한 소작인들을 진멸하고 포도원은 제때에 소출을 바칠 다른 사람들에게 다시 세를 주는 것이었다. 주인의 자리를 찬탈하고 진짜 상속자를 내쫓은 자들에게 기다리는 것은 오직 공의로운 심판뿐이라는 선언이다. 

하나님은 엘리야를 통해 아합에게 물으셨던 것처럼, 오늘도 탐욕에 눈먼 이들에게 “네가 죽이고 또 빼앗았느냐”라고 무섭게 되물으신다.

사람들은 기록에서 이름을 지우고, 교적에서 삭제하고, 공동체 밖으로 내쫓을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언제나 성문 밖의 핏소리를 들으시며, 그 이름을 결코 잊지 않으신다.


어쩌면 참된 교회는 권력의 중심이 아니라, 성문 밖에서 예수님과 함께 수치를 견디는 자리에서 시작되는지도 모른다. 낡은 울타리를 넘어선 광야일지라도, 성문 밖에서 피 흘리신 그리스도를 따르는 고독한 의로움 속에 하나님 나라의 참된 평안이 있기 때문이다.



이완구 박사 (맑은샘내과 원장, 전 영생감리교회 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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