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록 불빛과 푯대 - 인간의 근원적인 슬픔에 대한 고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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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완구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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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 입대를 앞둔 아들이 얼마 전 큰 교통사고를 당해 힘든 수술과 회복의 시간을 보냈다. 다행히 지금은 많이 나아졌지만, 그 일을 겪으며 나의 마음은 깊이 가라앉았다. 단단하다고 믿었던 신앙의 토대마저 흔들리는 듯했다. 앞으로 나아가야 할 인생이 오히려 뒷걸음질 치는 느낌, 그것은 단순한 슬픔이 아니라 딛고 서 있던 삶의 터전 자체가 흔들리는 상실감이었다. 마음을 추스르려 애썼지만, 헤집고 들어오는 우울 속에서 몇 주를 보내야 했다.이 우울감의 시작이 된 방아쇠는 아들에 대한 걱정이었지만, 일단 문이 열리자 사고와 아무 관련도 없는 오랜 아픈 기억들이 무력감과 함께 앞다투어 밀려왔다. 도대체 내 무의식에는 얼마나 많은 치유되지 못한 상처들이 쌓여 있었단 말인가. 항상 바쁘게 앞만 보며 달리느라 대충 반창고나 붙인 채 기억의 서랍 속에 우겨 넣었던 통증들이, 약해진 감정의 틈새를 타 무의식 속에서 소리를 지르며 기어 나오는 것 같았다.사람은 앞으로 걸어가는 존재 같지만, 실제로는 종종 과거라는 거대한 중력에 끌려 뒤로 밀려난다. 완전히 잊었다고 믿었던 기억들은 어느 날 불쑥 밀려오는 밤 파도처럼 마음의 해변을 뒤흔든다. 온전히 이해받지 못했던 소외의 순간, 상실해 버린 관계의 파편들은 흉터가 되어 영혼의 가장 깊은 곳에 남아 있다가 삶이 흔들리는 순간 다시 고개를 든다.대학생 때 읽었던 F. 스콧 피츠제럴드의 <위대한 개츠비>를 다시 집어 든 것도 그 무렵이었다. 개츠비의 슬픔은 나의 슬픔과는 결이 달랐지만, 잃어버린 과거와 허상을 좇다 파멸해 가는 그의 모습은 인간이라는 존재가 가진 근원적인 슬픔을 다각도로 반추하게 만들었다. 내면의 아픔과 결핍을 영원한 가치로 치유하지 못하면, 인간은 개츠비처럼 헛된 환영을 좇다 결국 무너지고 만다.1. 도금된 환영을 좇는 현대의 시지프들개츠비의 비극은 지나간 사랑과 흘러가 버린 시간을 되돌려 붙잡으려 했던 데서 시작된다. 그는 화려한 저택을 짓고 매일 밤 성대한 파티를 연다. 수많은 사람이 그의 집을 드나들지만, 그 모든 화려함은 오직 데이지라는 여인 한 사람을 다시 만나기 위한 무대였다.“과거를 되돌릴 수 없다”는 닉 캐러웨이의 말에 개츠비는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대답한다.
“물론 되돌릴 수 있고말고요!”
그러나 인간은 결코 과거로 돌아갈 수 없다. 지나간 시간은 기억할 수는 있어도 다시 살 수는 없다. 시간은 창조주 하나님의 영역이며 유한한 인간의 손아귀에 붙들리는 성질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개츠비의 삶은 그리스 신화 속 시지프의 형벌을 연상시킨다. 신들을 기만한 죄로 산꼭대기까지 무거운 바위를 끊임없이 밀어 올려야 했던 시지프처럼, 개츠비도 지나간 과거라는 바위를 현재의 정상까지 끌어올리기 위해 온 생을 바쳤다. 그러나 정상에 거의 다다랐다고 믿는 순간, 시간의 냉혹한 중력은 그 바위를 다시 심연으로 떨어뜨렸다.
물론 시지프의 반복이 신들이 내린 형벌이었다면, 개츠비의 반복은 자신이 만들어 낸 욕망의 형벌이었다. 그는 이미 사라진 과거를 현재 속에 복원하려 했고, 데이지가 과거의 모습 그대로 자신을 사랑하고 있다고 믿고 싶어 했다. 하지만 과거는 그의 기억 속에서 이미 현실이 아니라 환상이 되어 있었다.
그렇다면 개츠비가 그토록 갈망했던 건너편 선착장의 ‘초록 불빛’은 무엇이었을까.
그 불빛은 데이지 한 사람만을 뜻하지 않았다. 그것은 잃어버린 사랑과 되찾을 수 없는 과거, 부와 신분을 통해 완성할 수 있다고 믿었던 자아, 그리고 손을 뻗으면 닿을 듯하면서도 끝내 멀어지는 아메리칸드림이 겹쳐진 상징이었다. 피츠제럴드는 데이지의 목소리가 “돈으로 가득 차 있다”고 묘사한다. 개츠비가 사랑한 것은 데이지라는 한 여인이면서 동시에 그녀가 상징하는 화려한 세계 전체였는지도 모른다.
개츠비에게 초록 불빛은 미래에 대한 희망처럼 보였지만, 실상은 과거로 돌아가려는 욕망이었다. 그는 앞을 바라보며 달리는 것 같았지만, 사실은 끊임없이 뒤를 향해 달리고 있었다.
이 비극은 어쩌면 나의 이야기일 수도 있다. 우리의 이야기일 수도 있다. 우리에게도 각자의 초록 불빛이 있다. 누군가는 사라진 청춘의 영광을 붙들고, 누군가는 끝내 이루지 못한 성공을 갈망한다. 누군가는 사람들의 인정과 찬사를 얻으면 자신의 존재가 완성될 것이라 믿는다. 또 누군가는 오래된 상처와 억울함에서 벗어나고 싶어 하면서도 여전히 그 기억에 붙들린 채 살아간다.
우리는 저마다 의미를 부여한 바위를 굴려 올리며 그것이 삶의 전부라고 믿는다. 그러나 내가 밀어 올린 바위가 나의 존재를 완성해 줄 것이라 믿는 순간, 인간은 현대의 시지프가 된다.
2. 존재의 힘이 감소할 때 밀려오는 슬픔17세기 철학자 스피노자는 인간의 감정을 욕망, 기쁨, 슬픔이라는 세 가지 기본 틀로 설명했다. 그는 슬픔을 단순히 기분이 가라앉은 상태가 아니라, 인간이 더 큰 완전성에서 더 작은 완전성으로 옮겨 가는 것, 곧 자신의 활동 능력과 존재의 힘이 감소하는 정서로 이해했다.인간을 포함한 모든 존재는 자신의 존재를 지속하고 실현하려는 근원적 노력, 즉 ‘코나투스(conatus)’를 지닌다. 우리는 자신의 존재가 더욱 충만해질 때 기쁨을 느끼고, 존재의 힘이 꺾이고 축소될 때 슬픔을 경험한다.
그러나 영원하신 하나님이 아니라 유한한 것들에 마음의 무게중심을 걸어 둘 때 비극은 시작된다. 사랑, 성공, 명예, 공동체의 인정은 모두 필요한 것이지만 영원하지는 않다. 그것들을 삶의 궁극적인 버팀목으로 삼으면, 그 버팀목이 흔들리는 순간 인간의 존재 전체가 함께 흔들린다. 유한한 것을 영원한 것처럼 붙들 때, 상실은 단순히 무엇인가를 잃는 사건에 머물지 않고 나 자신이 무너지는 근원적인 슬픔, 절망으로 다가온다.
나 역시 그러한 슬픔의 터널을 지난 적이 있다.
한 교회의 신학적 문제를 알리고 진실을 밝히는 일에 오랫동안 마음을 쏟았던 때가 있었다. 칼럼을 쓰고 이대위에 보고서를 제출하며 하나님과 역사 앞에서 떳떳한 일을 하고 있다는 뜨거운 확신도 있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른 뒤 마음 밑바닥을 정직하게 들여다보니, 나 역시 또 하나의 ‘초록 불빛’을 바라보고 있었다.
하나님의 뜻을 따른다는 진실한 열심 속에도 사람들이 나의 수고와 의로움을 알아주고, 진실을 향한 외침에 공감과 연대로 응답해 주기를 바라는 마음이 섞여 있었다. 그런데 돌아온 것이 응원이 아니라 침묵이었을 때, 그리고 외면이었을 때, 나는 깊은 서운함과 허탈함을 느꼈다.
진실을 말하는 것 자체보다 사람들이 그 진실을 어떻게 받아들이는지가 내 마음을 더 크게 움직이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하나님의 인정보다 사람들의 반응에 더 많이 기대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내 마음의 버팀목이 흔들리자 존재의 힘도 함께 꺾였다. 그것은 스피노자가 말한 슬픔이면서, 동시에 내가 무엇을 의지하고 있었는지를 비추어 주는 영혼의 거울이었다.
3. 설명보다 필요한 침묵의 동행무너진 기대와 이유를 알 수 없는 고통 앞에서 인간이 진정으로 갈망하는 것은 논리적인 설명보다 깊은 이해다. 욥도 고통 속에서 친구들의 말보다 먼저 하나님의 깊은 침묵과 마주해야 했다.“내가 주께 부르짖으오나 주께서 대답하지 아니하시오며
내가 섰사오나 주께서 굽어보시기만 하시나이다.”(욥기 30장 20절)기도해도 응답이 없고 외침이 허공으로 흩어지는 듯한 하나님의 침묵은 사람의 침묵보다 훨씬 무겁다. 고통에는 이유가 있을 것이라 믿지만 그 이유를 알 수 없을 때, 인간은 고통 자체뿐 아니라 의미의 상실로 인해 더욱 깊이 무너진다.
욥을 찾아온 세 친구는 처음 칠 일 동안 말없이 그의 곁에 머물렀다. 그때까지는 그들은 훌륭한 위로자였다. 욥의 고통이 너무 커서 누구도 입을 열 수 없었기에, 그들은 욥과 함께 땅에 앉아 그의 시간을 견뎠다.
그러나 그들이 입을 열어 욥의 고통을 신학적으로 해석하고 교리와 인과관계로 설명하려 한 순간, 위로자는 정죄자로 변했다. 욥이 이토록 고통받는 데에는 숨겨진 죄가 있을 것이라고 추측했고, 자신들이 믿는 원칙 안에 욥의 고통을 억지로 끼워 맞추려 했다.
실존적인 고통과 삶의 부조리는 단순한 인과관계의 논리로 설명되지 않는다. 때로는 명쾌한 설명보다 말없이 곁을 지키는 침묵이 더 깊은 치유가 된다.
의사로서 수많은 환자의 고통과 생사의 갈림길 곁에 서며 배운 진리도 이와 같았다.질병의 기전을 설명하는 것과 그 질병이 가져온 두려움과 상실을 함께 짊어지는 것은 전혀 다른 차원의 일이다. 차가운 청진기를 내려놓고 말없이 손을 잡아주는 침묵의 동행이 치유의 참된 시작이 되듯, 욥의 친구들에게 부족했던 것은 지식이 아닌 아픔을 함께 울어주는 사랑이었다.4. 지나간 과거에서 영원한 푯대로스피노자는 인간의 슬픔을 정확히 해부했으나 완전히 치유하지는 못했다. 그는 지성으로 영원한 실재를 이해할 때 자유로워진다고 보았지만, 성경은 인간이 영원한 진리를 단순히 이해하는 존재를 넘어 '영원하신 하나님께 붙들린 존재'라고 말한다.사도 바울은 고백한다.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 (빌 3:13-14).바울이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린다"고 한 것은 과거의 흔적이 사라졌다는 뜻이 아니다. 자신을 붙드는 과거보다 비교할 수 없이 크고 영광스러운 그리스도의 사랑을 만났기에, 과거가 더 이상 현재를 지배하지 못하게 되었다는 고백이다. 응답 없는 침묵 속에서도 잡은 줄로 여기지 않고 계속 달려가는 것, 그것이 바로 신앙의 실존이다.개츠비는 초록 불빛에 마음을 걸었고, 시지프는 무의미한 바위를 밀어 올렸으며, 스피노자는 영원한 실재를 지성으로 파악하려 했다. 그러나 바울은 우리의 시민권이 하늘에 있음을 선포한다(빌 3:20).인간의 근원적 슬픔은 영원을 갈망하도록 창조된 존재가 영원하지 않은 유한한 것들에 마음을 매어두었을 때 발생한다. 그러므로 신앙이란 상처가 완벽히 소멸된 상태라기보다, 유한한 환영에서 영원하신 하나님께로 마음의 무게중심을 옮겨가는 평생의 여정이다.5. 다시 삶의 자리로.아들의 갑작스러운 사고를 겪으며 나는 내가 구축해 놓은 삶의 안락함과 신앙의 확신이 얼마나 쉽게 흔들릴 수 있는지를 절감했다. 오랫동안 마음 깊은 곳에 묻어 두었던 상처와 무력감이 파도처럼 되돌아와 나를 뒤로 밀어내는 날도 있었다.
하지만 신자의 길은 쇠하여질 초록 불빛을 붙잡으려다 무너지는 길이 아니다. 하나님의 침묵마저 지나 영원한 푯대를 향해 다시 노를 젓는 길이다.
내가 다시 일어서는 것은 내 의지가 강해서가 아니다. 내가 그리스도를 굳게 붙잡았기 때문이 아니라, 내가 힘을 잃어 그 손을 놓칠 때에도 그리스도께서 먼저 나를 붙들고 계시기 때문이다.
아들의 회복과 함께 나도 흩어진 마음을 추슬러 다시 청진기를 들고 삶의 자리로 돌아간다. 아직 다 아물지 않은 흉터를 품고서도, 과거의 중력에 끌려 뒤로 떠밀리기보다 영원히 쇠하지 않는 하나님 나라의 푯대를 바라보며 오늘도 한 걸음씩 앞으로 걸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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