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 분류

두 글자 요한복음 연재(16): 이 세상에 두 종류의 사람이 뛰놀고 있다고!

작성자 정보

  • 권혁정 작성
  • 작성일

컨텐츠 정보

본문

두 글자 요한복음 연재(16):

이 세상에 두 종류의 사람이 뛰놀고 있다고!

                                                                                               권혁정 교수


그러면 예수님이 니고데모에게 말한 위로부터 나는영적 거듭남, 중생이란 무엇일까요? 이는 3절과 5절을 서로 비교하면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3절에서 주님께서는 니고데모에게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5절에서는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라고 3절을 풀어서 설명해 주셨습니다. 따라서 거듭나는 것, 즉 위로부터 나는 것은 바로 물과 성령으로 태어나는 것이고, 하나님 나라를 보는 것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을 말합니다.

여기 거듭남의 비결로 제시한 물과 성령에 대한 해석이 다양합니다. 특히, 물에 대한 견해가 여럿인데, 어떤 사람은 물세례로 또 다른 사람은 말씀으로 이해합니다. 하지만 물과 성령은 서로 다른 두 개체가 아닙니다. 물은 하나님의 영인 성령의 메타포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주장을 뒷받침하는 근거는 3가지입니다. 첫째로, 에스겔 36-37장에 보면 물이 성령의 은유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둘째로, 요한복음에서 은 보통 성령을 의미합니다(4:14; 7:39). 마지막으로, 5절의 물과 성령으로라고 할 때 ‘-으로에 해당하는 헬라어 전치사 에크가 하나만 사용되어 물과 성령을 모두 지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물과 성령으로 태어난다고 하는 것은 두 종류의 서로 다른 출생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 즉 성령으로 태어나는 것을 말합니다. 특히, 물은 성령의 정화하는 사역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위로부터 나야 한다는 말씀은 위에서 오는 하나님의 힘, 즉 성령의 능력으로 다시 태어나야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서 하나님의 생명인 영생을 얻을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이렇게 다시 태어난 사람이 바로 영()에 속한 사람, 즉 성령이 그 안에 내주하는 중생한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시각에서 볼 때 세상이라는 운동장에는 두 종류의 사람만이 뛰놀고 있는 것입니다. 겉모습은 별 차이 없어 보이지만 성령으로 거듭나서 그 안에 하나님의 영이 내주하는 영에 속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중생하지 못한 채 여전히 육에 속해 있는 가련한 인생이 있는 것입니다.

니고데모처럼 제아무리 학식과 지위가 있고 사람들로부터 존경받는 경건해 보이는 사람일지라도 성령으로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의 진리를 설명해 주어도 말귀를 알아듣지 못하고 답답한 소리만 늘어놓을 수밖에 없고 결국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는 것입니다.

성령으로 거듭나는 것은 우리의 영원한 운명이 결정되는 참으로 중요한 일입니다. 그러므로 어머니의 모태로부터 육적으로 태어난 인간은 반드시 하나님으로부터 영적으로 한 번 더 태어나야 합니다.

그러면 위에서 오는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 다시 나게 되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 영생을 얻는 일은 어떻게 가능할까요? 이는 아래 세상에서 아무리 율법을 지키고 경건한 삶을 사는 일에 매진한다 해도 그것으로는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위에서’ ‘아래로내려오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십자가 사건을 민수기에서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들어 올린 사건에 빗대어 설명하셨습니다(14).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에서 모세를 원망하며 대들자, 하나님께서 독사를 보내 그들을 물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모세가 간구하자 하나님께서 구원의 방도로 구리 뱀을 만들어 장대에 달아 높이 들어 올리고 그것을 바라보는 자들은 살게 하셨습니다(21:4-9).

주님께서는 이 민수기 사건을 모형론적으로 자신에게 적용하십니다. 아래 세상의 율법의 최고봉인 니고데모조차 자신의 경건을 통해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그도 모세에 의해 장대에 달려서 들려 올려진 구리 뱀처럼 십자가에 달려 들려 올려지는 예수님을 바라볼 때만 구원을 얻을 수 있습니다. 구리 뱀이 하나님께서 출애굽 세대에게 마련해 주신 구원 얻는 방도였듯이 십자가에 달려 들려 올려지는 예수님이 하나님께서 마련해 주신 종말의 구원의 방도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바라보는 것이 바로 위의 하나님께 전적으로 의존하는 것인데 그때 하나님은 인간에게 위로부터 그의 영, 곧 성령을 부어주시어 이에 힘입어 인간이 거듭나고 영생을 얻게 된다는 것입니다.

아래 세상에서는 구원의 가능성을 찾을 수 없습니다. 유대교의 율법 준수, 플라톤 철학을 통한 지식 얻음, 불교의 깨달음, 스토아 철학의 자연에의 순응, 현대 과학 기술 혁명 등 아래 세상에서의 인간 문제 해결을 위한 그 어떠한 시도에도 구원은 없습니다. 구원은 오직 눈을 들어 위의 하나님을 바라볼 때만 가능합니다. 철저히 하나님께 자신을 던질 때만 구원을 얻을 수 있습니다. 구원은 오직 하나님께로만 옵니다. 오직 위에 계신 하나님의 은혜로만 구원이 옵니다.

관련자료

댓글 0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최근기사




알림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