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교도와 언약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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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광희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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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인, 특히 목사라면 청교도(Puritan)를 모르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막상 청교도가 무엇인지 설명하려고 하면 의외로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내용이 많지 않음을 발견한다. 익히 들어 알고 있는 청교도란 누구인가? 또한, 청교도와는 다른 언약도는 어떤 사람들인가?
청교도(淸敎徒)란 그 이름처럼 ‘순결한 신앙을 지키려 한 사람들’이다. 하지만 그 이름은 처음부터 호의적이거나 긍정적인 호칭이 아니었다. 청교도라는 이름을 처음 사용한 것은 청교도 자신이 아니라 청교도를 지극히 미워하는 쪽이었다.
영국의 여왕 엘리자베스 1세(Elizabeth I, 재위 1558~1603)는 영국을 “해가 지지 않는 나라”가 되도록 기초를 닦은 군주였다. 그러나 그녀는 신앙의 면에서는 아주 곤란한 왕이었다, 신앙의 자유보다는 정치적 안정을 앞세운 엘리자베스는 자신이 “영국 국교회의 최고 수장(Supreme Governor)”임을 주장했고, 이를 인정하지 않는 목사들을 파면하거나 추방하였다. 이때 장로교 목사들은 양심을 걸고 강력히 반발했다.
하지만 권력자 곁에 있던 주교들이 오히려 성경적 신앙을 지키려는 자들을 조롱했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매튜 파커(Matthew Parker, 1504~1575)였는데 그는 엘리자베스 1세 치하에서 캔터베리 대주교(Archbishop of Canterbury, 영국 국교회의 최고위직)로 봉직하던 인물이다. 파커는 비국교도 목사들을 가리켜 “자기들만 깨끗하다(pure)고 고집하는 자들”이라고 비아냥거렸고, 여기서 ‘퓨리탄(Puritan)’이라는 말이 생겨났다. 그러므로 ‘청교도’란 원래 ‘순결한 자’라는 긍정적 의미라기보다는 ‘독선적으로 자기들만 깨끗하다고 여기는 사람들’이라는 비난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러나 청교도들은 이 조롱을 오히려 자신들의 정체성으로 받아들였다. 그들은 국가 권력의 박해 속에서 목숨을 걸고 성경적 신앙과 교회 질서를 지키려 했다. 엘리자베스 1세 사후, 스코틀랜드에서 온 제임스 1세가 즉위하자 청교도들은 드디어 교회가 신앙의 자유를 얻을 것이라고 기대했으나, 제임스 1세가 돌변하여 청교도에 대한 압박 수위를 더 높였다. 끝내 청교도들은 고국을 떠나 새로운 땅을 찾아 나섰다. 그들이 뿔뿔이 흩어져 간 곳은 네덜란드, 스코틀랜드, 아일랜드, 그리고 무엇보다 북아메리카 신대륙이었다. 특히 1620년 메이플라워호(Mayflower)를 타고 플리머스에 정착한 청교도들은 훗날 미국의 기초를 세운 ‘신앙의 건국자들’이 되었다.
그렇다면 언약도(Covenanters)는 누구인가? 청교도에 비해 언약도는 훨씬 더 생소하다. 한 목사가 필자에게 “언약도가 무엇이냐?”고 묻기에 “장로교 제도를 확립한 스코틀랜드 사람들”이라고 대답하자, “그럼 언약도가 곧 청교도냐?”고 되묻는 것을 들은 적이 있다. 이처럼 언약도는 목사들에게조차 낯선 단어이다. 그러나 언약도는 청교도와 구별되는 역사적 정체성을 가진 신앙 운동이었다.
언약도의 명칭은 1638년 2월 28일, 에든버러의 그레이프라이어스 교회에서 체결된 ‘국가 언약(National Covenant)’에서 비롯되었다. 스코틀랜드 성도들과 지도자 1,638명은 이 언약문에 서명하며, 로마 가톨릭적 잔재와 국왕의 교권 간섭을 거부하고, 성경적 장로교 제도와 신앙을 지키겠다고 맹세하였다. 이후 서명자는 스코틀랜드 전역으로 확대되면서 수만 명이 이 서명에 동참하였다. 이 언약에 서명하고 목숨을 걸고 언약을 지켜낸 이들이 바로 ‘커버넌터(Covenanters)’, 곧 언약도이다.
국왕의 교회 간섭을 거부하는 국가언약은 정교분리(政敎分離)의 원형이다. 그런데 후대로 오면서 교회도 국가에 간섭하지 않는다는 개념이 정교분리에 덧붙여졌다. 하지만 이런 정교분리는 현실적으로 가능하지 않으며, 교회를 배제하려는 오염된 사상이다. 교회 신자가 곧 국민인데 어찌 정부를 외면할 수 있으며, 교회는 세상에서 소금과 빛인데 국가가 어디로 가든지 눈감을 수 있단 말인가?
이후 언약도들은 1643년부터 1648년까지 런던에서 열린 웨스트민스터 총회(Westminster Assembly)에서 장로교 신앙의 표준문서들을 작성하는 데도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오늘 우리가 사용하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대·소요리문답, 예배모범, 교회 정치 원리 등이 바로 이 시기에 확립된 문서들이다. 언약도의 지도자들 중 알렉산더 핸더슨(Alexander Henderson, 1583~1646), 새뮤얼 러더포드(Samuel Rutherford, 1600~1661), 로버트 베일리(Robert Baillie, 1602~1662), 조지 길레스피(George Gillespie, 1613~1648) 등은 총회의 핵심 인물로 활동하며 전 세계 장로교회의 표준을 세웠다.
그러나 언약도들의 역사는 곧 순교의 역사이기도 하다. 1660년 찰스 2세가 왕정복고와 함께 국교회 제도를 강제로 부활시키자, 스코틀랜드 언약도들은 다시 극심한 박해에 직면했다. 특히 1680년대는 ‘살인의 시대(The Killing Times, 1680~1688)’라 불릴 정도로 참혹했다. 이 시기에 수천 명의 언약도들이 교수형을 당하거나 총살을 당했고, 수만 명이 옥에 갇히거나 추방되었다. 그러나 그들은 결코 신앙을 굽히지 않았고, 오히려 순교적 증언을 통해 장로교 신앙의 순수성을 후세에 남겼다. 이처럼, 신앙과 양심을 지키다 순교한 언약도(Covenanters)들을 기리는 기념비(Grayfriars Covenantors’ Memorial)가 국가 언약을 체결했던 바로 그 곳, 그레이프라이어스 교회 내에 세워져 있다.
박해를 피해 흩어진 언약도들은 전 세계로 퍼져 나갔다. 그들이 이주한 곳은 아일랜드, 북아메리카의 버지니아와 캐롤라이나, 캐나다 노바스코샤, 호주, 남아프리카 등지였다. 특히 미국 남부로 건너간 언약도의 후예들은 남장로교회(Southern Presbyterian Church)를 형성하게 되었다. 이 교회는 성경의 절대적 권위를 굳게 붙드는 언약도의 신앙 전통을 계승했고, 19세기 후반에는 조선 땅에 선교사를 파송하여 한국 교회 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한국교회 초기 장로교 신학과 평양 중심 선교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인물은 북장로교회의 언더우드 선교사와 함께 남장로교의 사무엘 마펫(Samuel Austin Moffett, 1864~1939)을 중심으로 한 언약도의 후예들이었다. 그들은 조선을 복음화하고 특히 성경이 하나님의 무오한 말씀임을 굳게 믿는 순수한 복음을 전해 주었다.
우리 한국교회는 청교도와 언약도, 이 두 신앙 운동으로부터 큰 빚을 지고 있다. 청교도로부터는 신앙의 순결과 자유를 향한 투지를, 언약도로부터는 말씀을 위해 목숨까지 내던진 순교적 헌신을 유산으로 물려받았다. 따라서 먼저는 그분들에게 감사하기 위해서, 또한 우리의 신앙을 말씀 위에 굳건히 세우기 위해서 우리는 청교도와 언약도의 수고와 헌신을 반드시 기억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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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완구님의 댓글
- 이완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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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주의 신학이 창궐해 있는 이 시대에, 청교도와 언약도에 대해 공부하는 것이 참 의미있는 일인 것 같습니다.






